
시작은 작년 화단에서 받은 씨앗 한 줌
작년 가을, 아파트 화단을 지나가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채송화를 봤다. 그 순간 갑자기 어렸을 때 외갓집 마당이 떠올랐다. 외갓집 화단 한쪽에 채송화가 줄줄이 피어있었는데, 여름방학마다 내려가면 그 알록달록한 꽃들을 구경하는 게 그렇게 좋았다. 크면서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, 아파트 화단에서 우연히 마주친 채송화 덕분에 그 기억이 훅 떠올랐다.
반가운 마음에 씨앗을 조금 받아왔다. 씨앗이 워낙 작아서 잃어버리지 않게 작은 지퍼백에 넣어뒀다. 사실 별 기대는 없었다. "되면 좋고, 안 되면 말고" 정도의 마음으로 올봄에 화분에 대충 뿌려뒀는데, 어느날부터 싹이 트더니 지금은 한창 자라면서 꽃까지 피우고 있다. 외갓집에서 보던 그 색감이랑 비슷한 꽃이 우리 집 베란다에서도 피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, 볼 때마다 괜히 뭉클하다.
그런데 요즘 이 녀석 때문에 묘하게 억울한 일이 매일 반복되고 있다.
싹이 났을 때 있었던 해프닝
사실 자라는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. 채송화 싹이 막 올라올 무렵, 화분에 정체 모를 다른 식물이 하나 같이 자라기 시작했다. 뭔가 싶어서 뽑지 않고 궁금한 마음에 그냥 뒀는데, 꽤 클 때까지도 정체를 알 수 없었다. 나중에 찾아보고 나서야 그게 그냥 잡초였다는 걸 알았다.

잡초인 걸 확인하고 바로 뽑아줬더니, 그 이후로 채송화가 눈에 띄게 잘 자라기 시작했다. 아마 그동안 잡초가 영양분이랑 자리를 나눠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. 지금 생각하면 좀 더 일찍 알아보고 뽑아줬으면 꽃도 더 빨리 볼 수 있었을 텐데, 괜히 궁금하다고 놔뒀다가 시간을 좀 버린 셈이다.
출근할 땐 오므리고, 퇴근할 땐 또 오므리고
요즘 매일 아침 화분을 보고 나가는데, 신기하게도 출근 준비하는 시간엔 항상 꽃이 오므라들어 있다. '오늘도 안 폈네' 하고 나가서, 퇴근하고 돌아오면 또 오므려져 있다. 분명 낮에는 활짝 피어있었을 텐데, 정작 나는 그 타이밍을 한 번도 못 맞추고 있는 중이다.
처음엔 그냥 "얘가 나를 피해다니나" 싶어서 억울했는데, 찾아보니 이건 채송화 자체의 습성이었다.
알고보니 채송화는 원래 그런 애였다
채송화는 다육식물의 일종으로, 맑은 날 낮에 햇볕을 받을 때만 꽃을 피우고, 흐리거나 비 오는 날에는 아예 피지 않는다. 게다가 한 번 핀 꽃은 오후가 되면 시들어버리고, 밤에는 꽃잎을 오므린다.
즉, 내가 출근 준비하는 이른 아침엔 아직 해가 덜 들어서 안 핀 거고, 퇴근하는 저녁엔 이미 시들어서 오므라든 거였다. 나를 피해다니는 게 아니라, 직장인의 생활 패턴이랑 채송화의 개화 시간이 정직하게 어긋나 있을 뿐이었다. 알고 나니 억울함이 좀 누그러지긴 했지만, 그래도 여전히 활짝 핀 모습을 실컷 못 보고 있는 건 아쉽다.
재밌는 건 이 습성 때문에 나라마다 부르는 별명도 다르다는 점이다. 영국에서는 오전 11시쯤 핀다고 해서 '일레븐어클락(Eleven-o'clock)'이라 부르고, 인도에서는 오전 9시경 핀다고 해서 '나우 바지야(9시 꽃)'라고 부른다고 한다. 나라마다 해 뜨는 패턴이 다르니 붙는 별명도 제각각인 셈이다.

키우는 건 정말 쉽다
억울함과는 별개로, 채송화는 초보가 키우기엔 꽤 만만한 식물이라는 걸 요즘 계속 체감하고 있다. 적당한 햇빛과 토양, 물만 있으면 알아서 자라기 때문에 초보자도 무난하게 키울 수 있다고 하는데, 실제로 지금까지 물 주는 것 말고는 딱히 신경 쓴 게 없다. 씨앗도 화단에서 얻어온 거라 돈 한 푼 안 들었는데, 지금까지 잘 크고 있는 걸 보면 새삼 신기하다.
♧물주기: 흙이 바싹 마르면 그때 흠뻑 주는 중
♧햇빛: 단독주택2층 테라스라서 반나절 이상 직사광선 받음
♧특별 관리: 딱히 하는 게 없음 (잡초는 보이는대로 뽑아줌)
가끔 물 주는 걸 깜빡해도 다육식물답게 잘 버텨줘서, 바쁜 평일에 키우기엔 정말 부담이 없다.
요즘 매일 하는 관찰
요즘은 아침에 화분 상태를 확인하는 게 하나의 루틴이 됐다. 오므라든 꽃잎 사이로 새로운 봉오리가 올라오고 있는지, 잎이 더 무성해졌는지 매일 조금씩 살펴보고 있다. 아직 씨앗까지 맺히진 않았지만, 꽃이 진 자리를 보면서 언젠가 씨앗을 다시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.
다음엔 주말에 제대로 보고 싶다
평일엔 도저히 활짝 핀 모습을 볼 타이밍이 안 나오니, 요즘 세우고 있는 목표는 주말 오전에 여유롭게 화분 앞에 앉아서 만개한 채송화를 제대로 구경하는 거다. 그리고 씨앗이 맺히면 그것도 받아뒀다가 내년에 다시 심어볼 생각이다. 여러가지 색이 섞이면 더 예쁠것 같아서 돌아다니다가 채송화 보이면 씨앗을 더 얻어볼 생각이다. 외갓집에서 시작된 채송화의 인연이 이렇게 계속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.